'에우튀프론'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예요. '경건에 대하여'가 부제목이고요. 여기서 '경건'은 종교적 함의를 갖는 '덕'이지만, 현대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올바름'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아요. 이야기는 에우튀프론의 아버지가 죽음에 직면한 노예를 방치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우튀프론은 자신의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하려고 법원에 가다가 소크라테스를 만나요.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에게 경건이란 무엇인지 물으면서 대화가 시작되죠. 에우튀프론은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신명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소크라테스는 '신이 올바른 것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르게 되는 걸까'라고 질문하죠. 우리는 이들의 대화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프로 질문러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신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미워하는 걸 미워하는 게 경건이라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답변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아빠가 7살짜리 아이에게 자기 전에 양치질을 하라고 합니다. "귀찮은데 왜 해야 하죠?" 아이는 궁금해합니다. 아이는 그저 아빠가 하라고 했기 때문에 양치질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양치질이 좋은 행위이기 때문에 해야 할까요? 에우튀프론의 말처럼 '권위자가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라면 아이는 아빠의 판단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해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말대로라면, 양치질이 왜 좋은지를 고민해 보면서 아빠의 권위에 의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해야 할지, 그것의 판단 근거는 무엇일지 묻고 따져보아야 하죠.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건 인공지능이죠.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잖아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은 누구보다 빠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언젠가 인공지능의 판단이 정답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올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 대충 정해져 있는 매뉴얼 같은 게 있죠. 이걸 하면 성공하고, 저걸 하면 실패한다와 같은 것 말이죠. 누군가가 정해준 이야기입니다. 물론 정해 준 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나쁘지 않죠.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조차 나의 결정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내려준 결정인지 질문해 보면 좋겠어요. 비판적 사고를 멈춰선 안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끊임없이 묻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다."
난 부장이고, 넌 사원이야!
영어 단어 authority(권위)에서 파생된 두 형용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어요. '권위가 있는'(authoritative)과 '권위주의적인'(authoritarian)은 언뜻 보기에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대조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진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설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거든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권위주의적 태도로 몰아붙이죠. "난 부장이고 넌 사원이니까 내가 옳아!"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인 사람이 아니라 권위가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학자가 돼야 합니다. 아, 물론 철학 전공을 하라는 말은 아니고요. 철학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내가 어떤 근거와 믿음으로 판단했는지 생각하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이 과정에서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요. 이것을 저는 '철학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에우튀프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자리를 피해버리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끊임없는 질문이 얼마나 귀찮고 피곤한 일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녁, 귀찮음과 피곤함을 이겨내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에우튀프론'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